최근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공공주택 공급에 국민연금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하며 싱가포르 중앙연기금(CPF) 모델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법적 구조, 한국의 사유지 중심 토지 체계, LH의 재정 문제 등 현실적 제약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싱가포르 사례와 한국 상황의 차이를 비교하고, 국민연금의 역할과 가능성, 대안 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짚어봅니다.
싱가포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CPF와 공공주택 공급의 완전한 연계 구조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자가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약 90%가 자가에 거주하고, 이 중 약 77%는 공공기관인 주택개발청(HDB)이 공급한 공공주택입니다. 이런 놀라운 수치가 가능했던 핵심 배경은 바로 중앙연기금(CPF)입니다. CPF는 국민연금처럼 강제적으로 적립되는 기금이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다릅니다. 바로 개인 계정 기반이며, 주거·의료·교육·노후 등 특정한 목적에 따라 본인의 적립금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즉, 싱가포르에서는 개인이 적립한 연금 자금을 주택 계약금이나 대출 상환금에 직접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30대 맞벌이 부부가 CPF에 각각 4만 싱가포르달러씩 적립되어 있다면, 이 자금으로 42만 달러짜리 HDB 공공주택의 초기 납입금을 충당하고, 나머지 금액은 장기 저금리 대출로 부담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부는 대출 이자 일부를 지원하고, 주거 안정에 기여한 개인에게는 세제 혜택도 부여합니다.
또한, 주택을 매각할 경우 과거 인출한 CPF 원금과 ‘가상의 누적 이자’를 다시 계정에 반환해야 하기 때문에 기금의 지속 가능성도 확보됩니다. 이런 구조가 가능했던 배경은 싱가포르 정부가 전체 토지의 약 90%를 소유하고 있어, 언제든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토지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은 사유지 중심의 토지 소유 구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한국은 왜 어려운가? 토지 구조의 제약과 과거 보금자리주택의 소진
한국은 싱가포르와 달리 토지의 대부분이 개인 소유입니다. 이는 1940~50년대에 이루어진 토지개혁의 결과입니다. 당시 농지개혁을 통해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소농에게 분배했고, 이후 시장경제체제와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토지의 사유화가 일반화되었습니다. 현재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체 토지 중 국공유지는 약 24%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군사보호구역, 공공시설 용지 등으로 활용 가능성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추진된 보금자리주택 사업은 당시 남아 있던 주요 국공유지를 활용해 수도권 인근에 대규모 공공주택을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막대한 토지보상비와 저조한 분양률 등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남은 국공유지는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현재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저비용의 개발 가능 국유지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결국 한국에서 공공임대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하려면, 민간 소유지를 매입해야 하고, 이는 막대한 토지보상비와 사업비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수도권 3기 신도시 개발만 해도 토지보상금으로 40조 원이 넘는 금액이 투입되었습니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이 높은 한국에서 공공주택 사업은 토지확보 단계부터 고비용 구조로 운영됩니다. 싱가포르처럼 저렴한 토지를 바탕으로 대규모 공공주택을 짓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LH의 재정 위기, 공공임대 공급의 발목을 잡다
공공임대주택 공급의 주요 주체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최근 심각한 재무적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5년 기준 LH의 부채는 무려 126조 원에 달하며, 이는 총자산 대비 약 232%에 이르는 수치입니다. 이처럼 높은 부채율은 LH의 자금 조달 능력과 신용도를 심각하게 저하시킵니다. 특히 최근 금리 상승으로 인해 이자 비용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과거 추진했던 대규모 개발사업의 손실까지 누적되어 자산 건전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LH는 기존에도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위해 매년 수십 조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왔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시장에서 LH채권에 대한 신뢰도도 하락하고 있어, 신규 발행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정부도 공공임대주택의 대폭 감축을 검토 중이며, 신규 사업보다 기존 주택의 관리·운영에 집중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재무적 한계 속에서 국민연금을 새로운 자금조달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활용해 공공임대주택을 짓겠다는 주장은 LH의 부채 문제를 우회하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입니다. LH가 감당하지 못하는 공공부문의 역할을 국민연금에 떠넘기면, 장기적으로는 연금의 안정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노후 자산의 핵심 기반으로, 공공사업의 예산 대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국민연금이 공공임대주택을 지원한다고? 수익성·투명성·법적 구조 모두 문제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싱가포르의 CPF 사례를 언급하며 국민연금을 공공주택에 활용하자는 주장을 펼친 바 있지만, 실제로 국민연금은 싱가포르의 CPF와 구조 자체가 전혀 다릅니다. 국민연금은 통합 기금(pooling)으로 관리되며, 특정 목적에 따라 개별 수급자가 자금을 인출하거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국민연금법상 기금 운용은 수익성·안정성·공공성을 원칙으로 하며, 특정 정책적 목적을 위한 직접 투자 또는 정부 주도 사업의 재정 대체는 명백한 법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지자체가 발행하는 공공주택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이는 곧 정부 재정 사업을 우회 조달하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은 기금 규모가 1000조 원을 넘어서면서,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이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았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을 공공주택 건설 같은 논쟁적 분야에 활용할 경우, 그 파장은 단순한 수익성 문제를 넘어 국민적 신뢰 상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 정치권이 연기금을 "정부 쌈짓돈"처럼 여겨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자고 시도했던 사례들이 모두 좌절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실패 사례, 삼성 등 특정 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 논란 등이 이어지면서, 기금 운용의 독립성 문제는 매우 민감한 이슈입니다. 여기에 공공임대주택처럼 장기적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사업에 국민연금이 개입할 경우, 수익률 저하와 국민적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큽니다.
현실적인 대안: 제도 개선과 민관 협력 모델이 해법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이 공공주택에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신중해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직접 사업을 추진하기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델이 더 현실적이라고 조언합니다.
①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한 제한적 목적 투자 허용
국민연금법을 개정해, 청년·신혼부부 지원 목적의 공공임대주택 사업에 한정해 기금 운용을 허용하는 방안이 있습니다. 이 경우 수익률 보장을 위한 정부 보증, 회수 구조의 명확화, 그리고 기금 손실 시 책임 소재를 명시하는 법률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방식은 정치권, 특히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입법화 시도가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반발이 클 수 있습니다.
② 민간과의 합자회사(SPC)를 통한 간접 투자
두 번째는 민간 디벨로퍼, 건설사, 자산운용사 등과 함께 SPC(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해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국민연금은 출자자 또는 주요 채권자로 참여하며, SPC가 개발한 공공임대주택을 일정 기간 임대 운영한 후 매각하여 수익을 회수합니다. 이는 시장 기반의 수익성과 정책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절충안으로, 실제 일부 지자체에서 파일럿 형태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결론: 연금은 연금대로, 주거는 주거대로 따로 해결해야 한다
김성주 이사장의 발언은 청년층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을 수 있으나, 국민연금을 공공주택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은 현실적 제약이 크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 방안입니다. 싱가포르처럼 국토가 국유화되어 있고 개인 계정형 연기금이 운영되는 나라는 드뭅니다.
한국은 사유화된 토지 구조, LH의 부채, 국민연금의 법적 한계라는 3중 장벽을 극복하지 않고는 유사한 모델을 도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주거 문제는 정부의 정책적 결단과 예산 투입으로 해결해야 하며, 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